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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유영복 "북에 남은 동료 구출, 남은 사명"


국군포로 유영복 씨. (자료 사진)
국군포로 유영복 씨. (자료 사진)
북한에서 탈출한 국군포로의 수기가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함경남도 검덕 광산에서 수 십년 간 강제노동을 한 뒤 탈북한 유영복 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유 씨는 `피눈물 –Tears of Blood’란 제목의 이 책에서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겪은 고통 뿐아니라 6.25 전쟁 때 남북한에 모두 포로가 된 독특한 체험, 그리고 성분 차별 때문에 고통을 받은 가족들의 아픔을 잔잔히 그려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유영복 씨의 파란만장한 삶을 김영권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녹취: 유영복] “제가 이렇게 한국 땅에 와서 자유롭게 지내면서 생각한 것이 야 정말 북한의 그 비참하게 살던 포로들이 단 하루 만이라도 정말 대한민국의 조국 땅에 돌아와서 이 발전된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영복 씨의 목소리는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떨렸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이제 12년째. 하지만 비참한 생활 끝에 숨져간 국군포로 동료들, 국군포로 출신인 자신 때문에 끝없는 차별을 받아야 했던 동생들과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 속에 맺혀 있습니다.

[녹취: 전쟁 소음]

6.25 전쟁은 유영복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갑작스런 북한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20살 청년 유영복은 인민군에 잡혀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국군에 체포돼 거제수용소에서 포로로 2년을 보냈습니다.

[녹취: 유영복] “2년 후 1952년에 저는 솔직히 억울하게 끌려간 의용군이란 것을 주장했고, 북으로 가겠는가 남으로 가겠는가 심사를 받아서 나는 당당히 한국으로 간다. 내가 억울하게 비참하게 끌려 간 것이지 본의가 아니었다는. 그래서 서울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즉시 국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휴전을 얼마 앞 둔 1953년 유영복 씨는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중국 공산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유 씨는 포로 교환에 따라 한국으로 가리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유 씨와 포로들을 모나지 광산으로, 다시 검덕 광산으로 끌고 가 강제노동에 투입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설마 이런 생활이 10년이나 가겠는가, 그러다가 다 부려 먹을대로 부려 먹다가 보내 주겠지 했는데 끝내 저를 만 60세까지 광산 노동을 시키고 부려 먹었어요.”

한국 통일부에 따르면 유엔군이 추산한 국군 실종자 수는 8만 2천 명. 그러나 한국으로 최종 송환된 국군포로는 8천 343 명에 불과합니다. 반면 유엔군은 당시 북한군 포로 7만6천 119 명을 인도적 입장에서 모두 북한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올해 발표한 2012 인권백서에서 국군포로 대부분이 함경남북도의 탄광에 배치돼 강제노동에 종사하면서 억압과 차별을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저는 그래도 뭐 요령있게 살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겨우 버텼지만 거기서 정식으로 반항하던 사람들은 처단하고 일부는 어디로 끌고 간지도 몰라요. 다시 올아오지 않았으니까.”

유영복 씨는 북한에서 극적으로 어머니와 네 동생을 만난 뒤 우선 남한행에 대한 꿈을 접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당시 아버지는 큰 여동생만 남긴 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처가인 황해도 연백으로 피신시켰는데 당시 38선 이남이었던 연백이 휴전 때 북한으로 편입되면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북한에 남겨졌다는 겁니다.

[녹취: 유영복] “아버지와 여동생은 서울에 있고, 어머니는 북한 땅에 있고. 이런 처지에서 저는 아 이제 10년이나 20년 내 통일이 되거나 남북 화해가 될 것이다. 그 동안은 부득이 어머니와 동생들을 모시고 북한 땅에서 고통스럽지만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유 씨가 국군포로 출신이란 이유로 엄청난 차별과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너는 포로의 자식, 동생들이니까. 동생들도 비참하게 광산에서 일하게 됐죠. 그런데 동생들도 처음에는 저를 만나 반갑다 했지만 크면서 동생들은 군대도 안 보내주고 국군포로 가족이라 차별하니까 동생들도 그 때는 형을 오빠를 만난 걸 후회하고 원망하는 이런 처지에서 북한 당국은 말은 차별없이 대우한다고 했지만 포로 신분이니까.”

한국 통일연구원은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거주지역과 직장 선택에 제한을 받았고, 출신 성분이 자녀 등 가족에게 영향을 미쳐 자녀에게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습니다. 국군포로들의 자녀들은 특히 입당과 진학, 직장 선택에 차별을 받았다는 겁니다.

유영복 씨는 1994년 북한에서 결혼한 아내마저 병으로 떠나 보내고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걸었던 기대마저 무너지자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김대중 대통령이 혹시라도 와서 그 몇 만 명이 되는 국군포로 문제를 풀어주는 게 아닌가 했는데 그런 말이 한 마디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내 힘을 다해 내 발로 대한민국을 찾아 가리라. 그래서 성공한다면 정말 억울하게 비참하게 희생된 국군포로들의 모습들을 정말 온 세상에 증언하고 대변하고 하리라는 결심을 그 때 했습니다.”

유영복 씨는 결국 북한 탈출에 성공해 2000년 8월30일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게다가 94살의 나이로 생존해 있던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까지 누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축복 속에 전역식을 가졌으며 지난 해에는 북한에 있는 아들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와 마음의 부담을 덜었습니다.

유 씨 등 한국에 입국한 국군포로들은 특별법에 따라 포로가 된 날부터 한국에 귀환해 전역한 날까지의 보수와 연금, 주거지원비를 합산해 지원받습니다.

또 국군포로의 배우자와 자녀가 한국에 입국할 경우 일반 탈북자들에게 제공하는 정착지원금 외에 추가 지원을 받습니다.

유 씨는 거듭 한국이 발전한 모습에 무척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 뒤에 치른 값진 희생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모르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선배님들이 말씀하는 대로 자유는 거저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거처럼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한 뒤에는 지난 날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국군장병들이 포로가 돼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가에 대해 한국에 와 보니까 6.25 전쟁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사명감과 용기를 갖고 쓴 책이 지난 해 출간된 ‘운명의 두 날’ 이었습니다.

올해 82살인 유영복 씨는 최근 자신의 책이 ‘피눈물’ 이란 제목으로 미국에서 영문으로 출간돼 매우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책 출간을 계기로 제네바협정을 무시한 채 국군포로를 억압한 북한 당국의 국제법 위반 사실이 알려지고, 국군포로의 송환과 생사확인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유영복 씨는 국제사회에 이 말을 꼭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유영복] “국군포로 다 부려먹고 필요없이 된 70, 80이 다 된 노인들 마저 제 발로 걸어가는 것, 보내주지는 못할 망정 제 발로 걸어가는 것마저 잡아서 처단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해 격분합니다. 그런 노인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다시 총부리를 들고 들어가겠습니까? 북한의 이런 만행이 좀 더 국제사회에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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