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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A 창립 70주년 특집] 노금석의 자유를 향한 비행 (2)

  • 유미정

1954년 5월 미국 도착 직후 의회에서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만난 노금석 씨. (노금석 제공)

1954년 5월 미국 도착 직후 의회에서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만난 노금석 씨. (노금석 제공)

6.25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두 달 만인 1953년9월, 북한 공군 조종사가 소련제 신형 미그-15 제트기를 몰고 한국으로 망명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주인공은 당시 21살의 인민군 대위 노금석 씨. 노금석 씨는 한국 망명 직후 미국으로 건너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올해로 80살이 된 노 씨는 59년 전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을 탈출했다고 말했습니다. 내일 (29일)로 창립 70주년을 맞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노금석 씨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세 차례의 특집방송을 마련했습니다. ‘노금석의 자유를 향한 비행’. 유미정 기자가 그 두 번째 편을 전해 드립니다.

“아웃백(Outback)…오른 쪽이요? 라이트로 가도 괜찮아요… 라이트로 갈까요? 오케이…….(자동차 소음)”

노금석. 미국명 켄 로우( Kenneth Rowe). 북한 공군 소속으로 지난 1953년 9월 소련제 미그기를 타고 한국으로 탈출했던 그가 미국에 정착한 지 벌써 58년이 지났습니다.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체력을 자랑하는 노 씨는 점심을 위해 호주식 스테이크 고기 전문식당, 아웃백으로 기자를 안내했습니다.

“Yeah, that’s too big..I don’t want to have that big one. Maybe small one I order a rib eye..(Rib eye?) Yes. (Okay How do you want that cook? ) Medium.. (medium?)”

지난 13일 VOA 유미정 기자(왼쪽)와 인터뷰 중인 노금석 씨.

지난 13일 VOA 유미정 기자(왼쪽)와 인터뷰 중인 노금석 씨.

점심시간에 아웃백이 문을 닫는 바람에 대신 찾은 부근의 식당에서 노 씨는 유창한 영어로 스테이크를 주문합니다.

"I decide on ..what is the fresh seasoned vegetable? (Broccoli, snow peas and carrots..)"

따뜻한 날씨와 아름다운 해안, 그리고 자동차 경주 때문에 관광지로 유명한 미국 남부 플로리다 주의 데이토나 비치. 노 씨는 이곳에 위치한 엠브리-리들 항공대학에서 17년간 교편을 잡다 지난 2000년 은퇴했습니다.

어린시절 동경하던 미국에서 여느 미국인들처럼 자유롭고 여유있는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노금석 씨.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그의 미국 생활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소련제 전투기 미그-15기를 몰고 북한을 탈출해 김포비행장에 착륙한 지 7개월만인 1954년 5월,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에게 미국은 온통 낯선 세계였습니다.

<VOA 70 Anniversary Part 2 MJH (Act 5)> [녹취:노금석 씨] “미국에 살러 왔거든 내가..근데 아주 힘들었거든요…대개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오게 되면 학교 다니러 오거든요.. 근데 그 준비 다 되고 하는데 나는 군대 있다가 쓱 오니까 영어도 모르고, 영어도 모르니까 학교도 안가고 그 일자리 구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가야 되거든요, 합격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알아야 되거든요.”

북한의 강계에서 중학교 시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를 제일 잘 했다는 노금석 씨에게도 미국 말로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 식당 가서 음식 먹는데 메뉴 뭔지 알아야죠. 나보고 뭘 먹겠는가? 그래서 내가 식당 갈 때마다 메뉴 하나씩 가지고 집에 가서 공부 했어요. 메뉴 보니까 무슨 햄버거 독일의 도시 이름이 햄버거라는 데 있는데 햄버거를 거기다 써놓고 있고, 프렌치 프라이즈, 프렌치가 불란서인데..불란서를 프라이한 거거든 (웃음)”

방문 비자로 미국에 입국했기 때문에 해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일도 미국에서의 정착을 어렵게 했습니다.

노 씨는 미국 영주권을 원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자, 자신이 거주하는 델라웨어 주 상원의원을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그가 발의한 법안을 통해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사망한 줄 알았는데, 한국으로 피난 나왔던 어머니를 탈출 후 잠깐 만났던 노 씨는 갖은 노력 끝에 어머니도 미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 도착 직후 반 년간 노금석 씨는 밤마다 비행기를 타고 전쟁에서 싸우는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처음에 와서 잠자면 옛날 꿈만 자꾸 나오거든요..그 전쟁 같은 꿈이 자꾸 나오거든요. 전투하는 생각 그게 자꾸 나오지요. 그래 처음에 와서 아주 혼돈 많이 됐어요. 학교에 아침에는 가구요. 기숙사에 가서 공부하다 자면 꿈이 나오거든요. 그 때 눈 뜨면 또 아침이 되구요.. 근데 바빠서 식당에 가서 먹고 그리고 교실에 뛰어 가야지요.”

노금석 씨는 6.25 전쟁 중 1백 번의 출격에도 살아남았고, 탈출 비행 도중 미군의 레이다가 꺼져있어 무사히 한국에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노 씨에게 탈출 직후 또 하나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력 파악을 위해 미그기를 손에 넣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미국이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군에게 10만 달러라는 거액의 포상금을 수여하기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노 씨는 포상금을 받게 돼 기뻤지만, 돈은 결코 죽음을 각오한 탈출의 동기가 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돈 주기 때문에 도망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거든요. 첫째는 돈 가치를 모르고 둘째는 주는지 안주는 지 어떻게 알아요? 돈 가치를 모른다는 게 그 돈 가지고 얼마나 사는지 알아야지요. 그돈 가지고 한달 사는지 6개월 사는지 1년 사는지 그리고 문제는 나오다 죽는 게 문제거든. 목숨이 문제지 돈이 문제 아니거든요. 도망하는 건 자유에서 도망하지 돈 때문에 도망 안하거든요. 그냥 도망하다 죽으면 죽었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낯선 땅 미국에서 혈혈단신이었던 노 씨는 델라웨어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인 부인과 세 자녀의 단란한 가정도 이뤘습니다.

“듀폰, 제네럴 모터스, 보잉 컴퍼니, 제너럴 다이내믹스…….”

노 씨는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스,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스, 웨스팅 하우스, 록히드, 구르먼 등 미국에서도 내노라하는 유수 직장 15곳에서 근무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집념으로 근면 성실한 삶을 살았던 노금석 씨는 어느 새 기회의 땅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일해서 월급받구요, 그리고 투자한 돈은 그냥 거기 두고요, 그래서 저금을 자꾸 하고, 그 다음에 투자를 하구요, 아주 조심해서…그래서 돈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밀리언에어도 되구요 (웃음), 또 조심해서 하니까 밀리언이 또 되고 또 되구요, 퇴직하고 노인 돈이 나오는게 있구요, 사회보험에서 나오는게 있구요..그 다음 IRA에서 돈이 나오는게 있구요, 그 다음에 투자한데서 돈이 나오는게 있구요 그러니까 리타이어(retire) 했지만, 리타이어 안 했을 때보다 돈이 더 나오거든요….”

59 년 전 혐오하던 공산주의 북한을 탈출해 그토록 동경하던 자유세상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노금석 씨. 기자는 크게 성공한 인생을 산 그에게 아직 못다한 꿈이 과연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거 뭐 더 할게 뭐 있어요 지금 생각하니까…만약 한국이 통일이 되면 말이요, 이북에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전부…이북에 내가 여러 군데 살았으니까, 그래 내가 만주에도 여러 군데 있었으니까…통일이 되면…..”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보고 싶다는 노금석 씨. 그의 눈에서 어린시절 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함께 올라가곤 했다는 함흥의 산 꼭대기 반짝이는 저수지가 어른 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이 창립 70주년을 맞아 보내 드리는 특집방송, ‘노금석의 자유를 향한 비행’, 내일 이시간에는 세 번째, 마지막 편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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